잡기장입니다.


 글보기 :: 투하 지점을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는 자동차 속의 그녀
| View : 1,704 | Date : 11.5.17-am.12:30
 
 
 
"만약에..지금 서울 한복판으로 핵미사일이 날아 오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면, 선배는 뭘 하겠어요?"
휴일 시내에서 만나 모닝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한동안 교차로의 차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꺼낸 질문이었다.
"핵미사일? 글쎄. 정말 핵미사일이 날아 오면 그런 방송이나 하겠어? 다들 도망가고 없겠지."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에." 그녀의 시니컬한 반문.
"만약에라.. 그럼 얼마나 시간이 있는데?"
"그게 중요할까요?"
"인류 전쟁의 역사에 관한 책을 접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특히 핵전쟁에 관한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 뭐였더라. 그래 소제목이 '살아 남은자가 죽은자를 부러워하는 세상' 이라고 했던가? 뭐 미사일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나라 정도라면 도망가 봤자 피해 없는 곳은 없을 거야. 음..그러니까. 난 그냥 집에서 책상 정리나 하고 일기나 쓸까 싶어. 과연 차분하게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교차로는 휴일 아침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려는 듯 부드러워 보였다. 신호등도 차들도 교차로의 기다림을 싫어 하지 않는 눈치. 누구 하나 급할 것 없는 여유들. 빨간불일때는 멈추고, 초록불일때는 진행. 간단한 것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싸그리 잿빛이 되어 버리는 상상을 해요. 모두 다 사라져버리는 거에요. 모두 다. 제가 이상해보이죠?"
왠지 난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선과 악은 동전을 뒤집 듯 명료한 양면성을 가진 것이다. 하나일 수 없고, 홀로 있을 수도 없으며, 어느 한 쪽으로만 지속될 수도 없다. 문제는 지금 어느 면이 나오냐는 것. 마치 게임의 시작과도 같은 것이다.
한동안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 돌아 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함께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다시 말을 꺼낸 건 굉음을 내며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쏜살같이 교차로를 통과한 후였다.
"저 같으면 드라이브를 하겠어요."
"드라이브?"
"예. 폭탄이 떨어지는 곳을 향해 차를 모는거죠. 어차피 반대방향은 꽉꽉 막힐테니"
"살아 남아 죽은 이를 부러워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인가?"
"맞아요. 나중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살 같은 걸 할 용기는 없어요. 언젠가 텅빈 도심 한복판을 맘껏 달려보고 싶기도 했고요."
 
그녀는 점심에 교외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차를 가져왔던 참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로 걸어가며 물었다.
"내가 운전할까?"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어차피 바로 약속장소로 가야 하거든요.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려 드리면 되는거죠?"
"지금이 아니라.. 그 날 말야. 네가 말한.." 말을 끝마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깔. 과연 선배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주어 지긴 할까요?"
 
차 문이 열리는 소리, 가볍게 닫히는 소리, 키가 키박스에 꽂히는 소리와 시동 소리, 모든 것들이 경쾌하게만 들렸다. 그래, 오늘은 휴일의 아침이니까.
잠시 후 그녀의 차에서 내린 어느 거리, 난 그녀의 자동차가 다음 교차로를 넘어 멀어지는 걸 한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신호등은 끝 없이 초록색이었고, 또한 영원히 초록색일것만 같았다. 차가 보이지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돌아서서 다시 거리를 걸었다. 아직 점심 먹을 시간도 한참 남았네. 약속 없는 휴일은 어느 평일보다도 길어보이는 법이지.
 
텅 빈 거리.
투하 지점을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는 자동차 한 대.
가속 페달에 점점 힘을 주고 있는 그녀.
무슨 노래를 듣고 있을까?
아니, 무슨 노래를 들어야 할까.
천천히 주위가 어두워진다.
매일 오가던 길이 끝 없이 낯설게만 보이는 순간.
폴라로이드의 사진이 선명해지듯 서서히 모든 것들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내.
상황종료.
 
머리 속에 몽글몽글 버섯구름이 피어 오른다.
 
 
 
 
 
  
of NEUTRINO
 
 
 

 

ps.
벙개치고 혼자 광화문 모닝커피 마시며 쓴 글이랍니다. ㅎ_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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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that
기억
ㅜ.,ㅠ...결국...혼자서..그랬군요. 그녀와 함께였더라면 더 좋았을걸..그랬어요..
참..전 그때즈음이면..굉음과 함께 빠른속도로 질주하고 있을..그때즈음이면..아마도..
2011-05-17 10:20:27 
NEUTRINO™
가끔 휴일 아침 혼자 모닝커피를 마시기도 하는지라 나쁠 것도 없었답니다~ ^^;; 2011-05-18 00:58:42 
yoyo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보니...언니를 따라다니는 남자를 떼어내기 위한 동생의 조언
"언니의 본모습을 보여주면 그 남자는 빛의 속도로 떨어져나갈거야."

기회가 있다 해도 왠지 그녀의 차는 얻어타고 싶지 않네요.
2011-05-18 04:58:30 
명랑
벙개치면 저도 불러 주세요.
화목요일과 주말 빼고... ㅜㅜ(월수금 可!) ㅋ~
2011-06-29 18: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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